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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별을 보자

오래전 제가 연세대 의예과에 다닐 때 김동길 교수님이 영문학을 가르치셨습니다. 김동길 교수님은 강의 시간에 영어교재보다는 많은 이야기를 해주시곤 했습니다. 어떤 날 강의에 들어오셔서 “학생들 밤에 별을 쳐다본 일이 있나요. 공부하기 너무 바빠서 놀기 바빠서 별을 쳐다본 일이 없나요. 이제 여러분이 의사가 되어서 돈을 벌기 위해 인생을 즐기기에 바빠서 별을 쳐다볼 시간이 없다면 별을 쳐다볼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너무 불쌍하지 않나요” 하면서 월즈 월스의 무지개라는 시를 읊어 주셨습니다. My heart leap up when I behold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창문을 향해 서서 그 시를 읊는 모습이 정말 멋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모습에 반해서 나도 그 시를 외우고 아직도 가끔 읊고 있습니다. 마지막 절 I could wish days of my life bound by each to each with natural purity 라고 하며 눈을 떼일 때 같은 남자지만 저런 남자와 연애를 하면 얼마나 멋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매일 아내와 같이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걷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네의 골프장 주위를 한 바퀴 돌면 약 3마일이 되고 9000 발자국이 됩니다. 그리고 아침에 걸을 때마다 하늘을 쳐다보고 별을 봅니다. 플로리다의 하늘에는 별이 많이 보입니다. 북두칠성도 보이고 이름 모를 별들이 총총하게 보입니다. 그러면서 별을 바라보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을 돌아봅니다. 병원에서 일하면서 새벽 6시 30분에 집을 나와 차를 몰았지만 차고에서 나와 신호만 보고 차를 달리는 길에서 별을 볼 생각을 못 했습니다. 왜 그렇게 바빴는지 모릅니다. 무엇에 정신이 그리 쏠렸는지 모릅니다. 그저 살기에 급급했었습니다. 아니 김동길 선생님의 말씀처럼 세상의 먼지에 가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저 돈을 벌고 자식들 먹여 살리고 좋은 차 사고 친구들과 놀러 다니기에 정신이 없어 하늘을 쳐다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은퇴하고 비로소 하늘을 쳐다보고 별을 쳐다보았습니다. 서울의 하늘에서는 별을 볼 수 없었습니다. 별만 아니라 보름달도 볼 수 없었습니다. 보름달이라고 하는데도 도시의 오염 때문에 앞을 가리는 아파트 건물 때문에 달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별을 볼 수 없는 삶이 얼마나 삭막한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서울의 사람들도 먹고살기에 눈이 어두워져서 별을 쳐다볼 마음의 여유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밤이 없다는 서울에서는 별을 볼 마음의 여유도 시간도 없겠지요.     은퇴하고 뉴저지로 왔습니다. 그리고 습관대로 4시 반에 일어나 나와서 걷습니다. 그런데 뉴저지의 밤하늘에서도 별을 볼 수 없습니다. 어쩌다 한두 개 희미하게 보일 뿐 인공위성의 가짜별이 더욱 환하게 보일 뿐입니다. 물론 뉴저지의 하늘에서는 달이 환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달은 매일 보이는 것도 아니고 매일 같은 모습의 달이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밤하늘에 별이 보이지 않은 삶을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할까요. 꿈을 잃어버린 삶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요.     오래전 여행을 하면서 알래스카에서 보던 밤하늘이 생각납니다. 밤하늘에 총총한 밝은 별, 그 맑던 하늘 그리고 몽골의 고비사막에서 보던 밤하늘. 마치 별이 하늘에서 쏟아질 것 같던 그 하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별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삶과 별을 보고 싶어도 대기의 오염이 하늘을 가려서 별을 볼 수 없는 도시의 삶과 그 어느 것이 더 삭막할까요. 김동길 교수님이 지금 계신다면 무엇이라고 말씀을 해주실까요. 새벽에 더욱 밝다는 플로리다의 별을 쳐다보며 중얼거립니다. 별을 보자, 꿈을 보자고. 이용해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김동길 교수님 김동길 선생님 강의 시간

2022-12-28

[추모 글] 나의 영원한 스승, 김동길

무지개를 사랑하며 아침 해가 뜨는 것과 저녁놀에 무한한 매력을 느끼셨던 김동길 교수님!     교수님께서는 (사)태평양시대위원회를 조직하시며 “장차 한국이 태평양을 중심으로 한 인류의 새 시대를 이끌어 가는 주역이 되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 높은 수준의 도덕, 높은 수준의 생산성이 있는 민족이 되어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민족은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며 저희에게 창조적 소수가 되길 당부하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보스턴 대학교에서 서양사를 공부하시고 귀국하신 후 조국의 민주화라는 새로운 민족적 과제를 안고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자유민주주의의 참된 가치를 가르치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역사와 상황을 외면하시기보다는 이에 도전하는 고역을 택하신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이셨으며 반독재 민주화 투쟁의 격랑을 몸으로 감당하셨습니다. 교수님께서 유신헌법 철폐 운동을 주도하고 학생시위를 충동하여 내란을 선동했다는 조작된 혐의로 인해 징역 15년형을 받았을 때 “법이 법 같아야지!”라는 말을 남기며 항소를 포기하신 것은 법조계에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군사 독재자들이 교수님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지만, 교수님의 가슴에는 분노나 원한의 감정이 없이 오히려 시련과 고통을 안겨준 그들을 사랑으로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교수님의 글은 역사가가 지녀야 할 안목에 뛰어난 문장력과 유머로 조화를 이루어 늘 진한 감동을 자아냈습니다. 학창시절 저의 가방에는 언제나 교수님의 책이 들어 있었습니다. 새로 나온 교수님의 책을 구입해서 밤을 꼬박 세우며 읽은 날도 무수히 많았습니다. 지금도 제가 소중히 보관하며 사용하고 있는 몽블랑 만년필은 대학생 시절에 교수님께서 몽블랑 만년필로 칼럼 쓰시는 모습을 어느 월간 잡지 사진에서 보고 너무 멋이 있어서 곧바로 만년필 가계로 달려가 구입한 것입니다. 특히, 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교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인생의 주제는 사랑이고, 역사의 주제는 자유”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교수님께서는 저희에게 자유와 사랑은 나무와 뿌리처럼 얽히어 있는 것이라며, 프랑스 대혁명이 자유와 평등과 사랑을 3대 모토로 내걸면서 자유를 우선 앞장세운 그 뜻을 이해하길 바라셨습니다. 특히 존재의 유일한 기초는 자유라고 강조하시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유이며 자유가 없으면 인간의 생존에는 이렇다 할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교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이웃을 사랑하는 감격 속에서 사시며 “사랑 때문에 나는 자유를 택하였고, 사랑이 영원하기 때문에 자유 또한 영원하다”는 말씀을 저희에게 항상 하셨습니다.     제가 교수님의 부름을 받아 (사)태평양시대위원회 미주 회장직을 맡아서 교수님의 일을 도우며 개인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5년의 세월은 저에게 너무나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교수님께 길을 물었으며, 교수님께서 저에게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후로 교수님은 저에게 ‘큰바위 얼굴’이 되셨습니다.     역사의 언덕 위에서 예언의 나팔을 부셨던 교수님! 저희의 곁을 떠나셨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저희도 언젠가 교수님이 계신 곳으로 갈 것입니다. 다만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저희는 교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 높은 수준의 도덕, 그리고 높은 수준의 생산성을 가진 창조적 소수의 삶을 살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교수님, 존경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손국락 / (사)태평양시대위원회 미주 회장추모 글 김동길 영원 김동길 교수님 스승 김동길 몽블랑 만년필

2022-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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